하동군 옥종 지역 남명학파 유적지 답사(1)
조경학도인 내가 경상국립대학교 한문학과 수업을 듣게 된 과정은 묘하지만 수업이 진행되면서 더욱 흥미롭고 재미있다. 이번 답사지를 보면서도 조경학과 답사인지, 한문학과 답사인지 헤깔릴 정도로 엇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에 또한 놀랐다.
실제 답사는 같은 장소를 가더라도 조경학과의 시각은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 중심이 된다면, 한문학과의 시각은 시간을 읽어내는 것이 중심이었다고 크게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물론 공간을 보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고, 시간을 읽어내면서도 공간의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중심추가 조금 다를 뿐 답사의 느낌은 매한가지로 느껴졌다.
1. 옥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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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학과 답사의 경우, 서원을 들어서게 되면 각 전각들의 위치를 일단 파악하고 전, 후의 풍광과 경치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에 반해 한문학과 답사는 현판부터 보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긴 했다.
옥산서원 옆에 자리를 잡고 계신 주인분이 산에서 옮겨놓은 으름덩굴 꽃의 향기가 주변을 진동하고 있는 것이 향기로웠다.
옥산서원은 정몽주를 봉안한 전국의 16개 서원 가운데 경상남도에 위치한 유일한 서원이다.
옥종면 정수리 영당마을은 영일 정씨(迎日鄭氏)의 세거지로, 1715년(숙종41) 시조(始祖)인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정몽주의 손자이자 세조 때 사육신(死六臣)의 무죄를 주장하다 죽은 설곡(雪谷) 정보(鄭保), 증손자인 도암(道菴) 정지충(鄭智忠), 5세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증숭록대부 우의정 임헌공(林軒公) 정세필(鄭世弼), 8세손 학포(鶴圃) 정훤(鄭暄) 등 이름난 선조 6명의 위패를 봉안한 세덕사(世德祠)를 지었다.
그 후 1830년(순조30) 예조에서 세덕사를 서원으로 승격시켜 옥산서원이라 이름하고 정몽주의 위패만 봉안하였으며, 10년이 지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 종래의 세덕사는 진양군 대평면에 있는 정훤의 은거지 고산정(孤山亭)으로 옮겼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의 건립은 1374년(공민왕 23) 정몽주(鄭夢周)가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로 진주에 와서 비봉루(飛鳳樓)에서 하루를 묵은 인연으로부터 비롯된다. 정몽주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상남도의 유림과 후손들이 예조(禮曹)에 주청하여 옥산서원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1868년(고종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그 자리에 영당(影堂)을 지어 정몽주의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석채례(釋菜禮)를 올렸다. 지역 유림과 영일 정씨 후손들이 힘을 모아 1965년 서원을 복원하고 사당을 신축하여 문충사(文忠祠)라 이름 짓고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옥산서원은 강당(講堂) 5칸, 사우(祠宇)인 문충사 3칸, 영당(影堂) 1칸, 동재(東齋)인 부리재(富理齋) 3칸, 장판각(藏板閣) 2칸, 정문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충사 서쪽 옆으로 영당이 자리 잡고 있다. 장판각은 본래 서재(西齋)이던 건물을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적인 장판각과는 달리 마루에 올라 방 안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현재 옥산서원은 영일 정씨 문중 소유로 정찬교가 관리하고 있다. 정몽주의 기일(忌日)인 음력 4월 4일에 유림이 모여 향사를 지낸다.장판각에 『포은집(圃隱集)』 옥산본(玉山本) 판본과 『설곡실기(雪谷實紀)』 등이 보관되어 있다. 1983년 7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7호로 지정되었다.
2. 지족당 조지서 묘소와 오천 정씨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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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스승이 되었다가 밉보여서 참형을 당한 조지서와 그 화를 당한 후 험난한 일을 겪으면서도 남편 조지서의 아이를 키워낸 후처인 연일 정씨 이야기는 당시의 여러 사회의 면면을 알 수 있을만한 사건이고 남은 유산들로 여러 상황을 알 수 있다.
조지서 누이의 손자가 조식 선생임을 감안하고, 조식 선생의 남명집에 여러 이야기들을 남긴 것으로, 많은 생각을 연상시키는 장소였다.
3. 함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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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함월정은 보전을 위해 현대식 샷시를 부착하는 등 모습이 많이 변형되었지만 그 주변의 경치는 여전할 수 있다. 다만 조선후기에서 부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많은 누정들도 나름의 연유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도 남겨놓으면 좋겠다 싶었다.
4. 사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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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필 교수님의 깊이 있는 설명은 이번 답사를 하면서 선생님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 임의제 교수님과 떠나는 답사에서도 늘 느끼지만 체감을 통해 설명을 하는 강의는 감동이 없을 수 없다.
비록 작은 서당이지만 그 안의 담겨진 이야기들과 그것을 이어가려는 것이 반가웠다.
조경 답사였으면 당연히 거론되어질 방지 또한 반가웠다.
하우선의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자도(子導), 호는 담헌(澹軒)이다.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 1603~1651)과 설창(雪牕) 하철(河澈, 1635~1704)의 후손이다. 고조부는 하재원(河在源)이고, 증조부는 하상호(河相灝)이며, 할아버지는 니곡(尼谷) 하응로(河應魯, 1848~1916)이다. 아버지는 사와(士窩) 하재도(河載圖, 1869~1931)로, 대대로 남명학의 계승과 수호에 핵심적인 구실을 담당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김회경(金會卿)의 딸 강릉 김씨(江陵金氏)이다. 부인은 조용효(趙鏞斅)의 딸 함안 조씨(咸安趙氏)이며, 그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
하우선(河禹善)은 1901년(고종 38) 8세 되는 해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이 집에 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면우에게 절을 올리고 난 후 “순임금이 우임금의 아버지를 처형하였는데, 우임금은 순임금에게서 천하를 물려받은 것이 옳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면우가 기이하게 여기고 격려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겸재 하홍도의 강학 공간인 모한재(慕寒齋)에서 독서하였다.
1914년 봄 거창 다전(茶田)으로 가서 면우 곽종석에게 제자의 예를 올렸다. 같은 해 겨울에 가서산방(架西山房)에서 벗들과 강학하였으며, 이듬해 봄에 다시 모한재에서 강학을 하였다. 1930년 함안의 일산(一山) 조병규(趙昺奎), 밀양의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봉화 유곡(酉谷)의 권상익(權相翊), 안동 도산면 의인(宜仁)의 동전(東田) 이중균(李中均), 현풍 중부촌(中部村)의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등을 두루 방문하여 평소에 의문스러운 점들을 질의하였다.
1939년 선비들과 모한재에서 모여 수속계(修續契)를 만들었다. 1956년 덕천서원(德川書院)의 원임(院任)이 된 뒤 유계(儒契)를 만들어 동재(東齋)를 건축하였다. 1964년 고을의 선비들과 문하의 제자들이 유계를 만들어 그가 거처하던 곳 옆에 3칸의 사산서당(士山書堂)을 지어 주어 그곳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우선이 살았던 시대는 일제에 의해 주권이 침탈당한 때이었다. 따라서 그의 생애에서도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 정신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하우선은 일찍이 안중근(安重根)이 여순감옥에서 사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분강개하여 애도하는 글을 지은 바 있다.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 1870~1946)이 그 글을 보고서 칭찬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또한 1920년 말과 1921년 여름, 두 차례에 걸쳐 매부인 박낙종(朴洛鍾)이 방문하자 함께 며칠 동안 고금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해 토론하였으며, 나라를 잃은 슬픔을 시로 지어 탄식하였다.
1937년에는 고을 선비들과 망국(亡國)의 한(恨)을 씻기 위해 ‘구졸계(九拙契)’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왜경에게 혐의를 받아 진주 수곡(水谷) 조계촌(朝溪村)으로 거처를 옮겨 화를 면하였다. 1943년에는 변산(卞山) 강영만(康榮晩) 및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와 함께 진주를 유람하고 촉석루에 올라 임진왜란에 대해 담론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문집 11권 5책 『담헌집(澹軒集)』이 있다. 또한 선조인 설창 하철의 실기(實記)와 니곡 하응로의 유집(遺集)을 찬수하여 간행하였으며, 그가 원임으로 있던 덕천서원의 역사를 기록한 『덕천연원록(德川淵源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묘소는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사산서당의 뒷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