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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옥종 지역 남명학파 유적지 답사(2)

birdingmate 2026. 4. 2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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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옥종 지역 남명학파 유적지 답사(1)

조경학도인 내가 경상국립대학교 한문학과 수업을 듣게 된 과정은 묘하지만 수업이 진행되면서 더욱 흥미롭고 재미있다. 이번 답사지를 보면서도 조경학과 답사인지, 한문학과 답사인지 헤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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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 이어서

5. 모한재(慕寒齋)

  모한재는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공사기간이 2025. 10월부터인데 끝나는 시점이 지워져있다. 자재부족인가? 그 앞을 당당히 지키고 선 은행나무의 기운이 숲 전체와 어울리는 풍경이 보기 좋았다.
  어쩌면 지나칠 수도 있는 냇가의 ‘영귀대(詠歸臺)’, 글자를 찾아 보니 그 또한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에 있는 조선 후기 하홍도(河弘度)를 기리는 사당으로,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776번지 사림산 아래에 위치한다.
  모한재(慕寒齋)는 겸재(謙齋) 하홍도[1593~1666]가 학문을 갈고 닦으며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635년(인조13)에 건립하였다. ‘모한’이라는 재명은 ‘주자의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사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모한재의 벽상에는 ‘백록동규(白鹿洞規)’, ‘십훈(十訓)’, ‘경재잠(敬齋箴)’, ‘사물잠(四勿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써서 걸어두었다. 명분은 문생 교육용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홍도의 자신의 학문적 지향을 반영한다. 결국 모한재는 자신의 학문적 온축에 더해 후진양성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주자 및 조식의 학문적 지향을 담은 ‘겸재학(謙齋學)’의 연수라 할 수 있다. 모한재에서의 강학은 엄격했다. 문인들은 매월 회강의 규칙을 엄수해야 했다. 학업에의 정진을 위해 거접하는 문생들이 적지 않았지만 승도들의 관리 속에 양질의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모한재는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을 비롯한 당대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다. 모한재에는 미수 허목이 친필로 쓴 모한재의 현판과 기문, ‘영귀대(咏歸臺)’라는 금석문이 남아 있다.
  모한재에는 하홍도의 위패가 있는데, 위패는 원래 종천서원(宗川書院)에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면서 모한재로 옮겨 오게 되었다. 모한재 강당 마루에는 옛 종천서원의 현판 등도 보관되어 있다. 2001년부터 행정적 지원을 받아 담장 보수 등 경내를 관리하고 있다.
  모한재 경내에는 사당인 모한재, 경승루(敬勝樓), 관리사, 협문, 출입문인 도광문(道光門), 국헌처사 진양하공 사적비(菊軒處士晉陽河公事蹟碑) 등이 있다. 중심 건물인 모한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며, 관리사가 외쪽으로 붙어 ‘ㄱ’자 형태를 이룬다. 모한재의 입구에는 유적이 오래되었음을 알려 주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2그루 있으며,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후손들을 중심으로 매년 음력 3월 10일 겸재 하홍도의 기제일에 석채례를 올리고 있다.

 

6. 문암

 

현재는 文岩, 전엔 門岩









  종화리의 동문 역할을 하는 곳으로 안계와는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 덕천강 하류와 연접하고, 징담(澄潭) 가에 큰 돌이 대립하여 ʻ문바위[門岩]’라고 불렀지만, 하씨들은 이를 ʻ문암(文巖)’이라 칭한다. 이곳 문암에는 병자호라 직전 하홍도(河弘度)가 잠시 우거한 적이 있고, 그 뒤 조카 하철(河澈)이 이를 계승하여 유식처로 삼는 과정에서 하씨와의 연고가 깊어졌다. 석면에 각자된 ʻ문암(文巖)’ 또한 하철의 글씨이다.

 

 

7. 하홍도 묘소

  묘소 자체야 어떤 의미가 있겠냐만은 비석의 글씨와 묻힌 사람의 흔적과 자취를 곱씹어보면 할 말이 많은 장소 이다. 일단 겸재 하홍도의 묘소는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 겸재는 정선 아닌가? 할테고... 나 또한...
  남명학의 계승자로 '남명 이후 제1인자'라 불리는 겸재 하홍도 선생의 묘소는 미수 허목 선생이 직접 쓰고 지은 비석만으로도 찾아온 보람이 충분했다.

8. 공옥대

 

 하루 여정의 마지막은 공옥대에서 마무리를 하였다. 이번 답사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역시나 아는만큼 보이는 거... 맞다... 그거다... 답사 라는 것이… 나는 다분히 이공계열의 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써 한문도 제대로 못 읽어낼 때가 많은 사람이지만 앞으로도 읽으려 노력해야겠다.
  조경 답사가 공간을 보고 시간을 유추한다면, 한문학 답사는 시간을 확인하고 공간으로 확장해 나가는 답사인 것 같다. 분야는 다르지만 학문을 한다는 것, 그리고 삶의 흔적을 쫓는다는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은 답사였다. 분야가 다른 시각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이번 답사가 고맙게 느껴졌다.

 

  수곡의 서쪽 조계마을 앞 덕천강을 건너면 하동군 옥종면 병천리에 닿고 마을 앞 넓은 들판에 속칭 알산(卵山)이라 부르는 둥근모양의 소나무 숲이 개천옆에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전에 남명의 제자들이 숲을 베고 석단(石壇)을 쌓아서 30여명이 앉을만한 넓이가 되었는데 공옥대(拱玉臺)라 부르고 24현(賢)이 수계(修契)하고 학문을 닦던 곳이다. 공옥대 24현이란 왕자사부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 1530-1592)을 비롯하여 대각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는 일곱분과 남명의 그외 제자들이다. 여기에는 옥종주부공파의 남계(南溪, 휘 純勛=蕃)공과 남명의 아들 모정(慕亭) 조차마(曺次磨)도 참여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난정(蘭亭)이 우군(右軍)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맑은 여울과 긴 대나무는 공산(空山)에 잡초가 우거져 덮였을 것이다’라고 송정 하수일은 기록하고 있다.(拱玉臺記 = 松亭集)
  난정이란 중국 절강성(浙江省) 남서에 있는 명승지이다. 그 옛날 동진시대에 우군장군 왕희지(王羲之) 등 41인의 명사들이 모여 풍아(風雅)로운 모임을 가졌던 곳의 지명이며, 그때에 명사들이 지은 시를 엮은 것이 난정집이고 그 서문은 왕희지가 지었는데, 후에 당나라 태종도 천하 제일의 행서라고 칭찬하였다는 난정서(蘭亭序)이다.
  공옥대는 내복재(來復齋, 覺齋의 또다른 號) 하공이 제안하고 모옥(茅屋) 강경윤(姜景允) 공이 주관하여 완성하고 문인들을 초청하여 명승을 감상하면서 한 번 읊조리고 한잔 마시고 정수(精粹)한 정을 끌어내고 깊숙한 마음을 펴내어 시를 지었으니 난정의 시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그 시기는 모촌선생께서 45세가 되는 선조 18년 을유년에 하각재(河覺齋)‧유조계(柳潮溪) 등과 공옥대에서 수계(修契)했다라고 하니 서기로 1585년이 되며, 보통 24명이 봄-가을에 모여서 강론하였다고 한다..(茅村先生
文集=年譜)